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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군의 역사 스토리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생애와 페르시아 원정 정복 영토 및 업적

by D군 2022. 10. 18.

BC 약 356년 태어난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ros the Great)은 13세가 되던 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영향을 받아 철학과 의학 그리고 과학적 분야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지식들은 이후 알렉산드로스가 군사를 지위하고 전략과 전술에 천부적인 기술을 가지는 토대가 되었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 마케도니아 군사력을 인도까지 진출시켰으며, 지역 왕국들로 이루어진 헬레니즘 세계의 토대를 쌓은 위대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살아 있을 때부터 위대한 영웅에서 죽은 이후에도 전쟁의 신으로 불리는 전설의 주인공이 된 인물입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동상
알렉산드로스 대왕 동상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ros the Great)의 유년시절, 세계 정복을 꿈꾸다

알렉산드로스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인 필리포스와 어머니 올림 피아스는 이혼을 하였고, 그는 아버지의 새 결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뒤 친어머니와 함께 에페이로스로 도망갔다가 한참 이후에 일리리아로 가게 됩니다. 다시 아버지와 화해를 하고 마케도니아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이미 후계자의 지위가 위험한 상태였지만 군대의 높은 지지를 받으면서 반대하는 사람 하나 없이 왕위를 계승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왕이 되기 전부터 페르시아 원정을 결심하고 있었으며 그가 성장하는 내내 세계 정복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의 아버지가 창건한 군대를 유지하고 자신이 빚진 500 달란트를 갚기 위해서 페르시아의 부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당시 스파르타 아게실라오스와 그리스 원정군인 만인 대가 페르시아 영토 내에서 성공적인 전쟁을 이끌어냄으로써 페르시아 제국의 취약성을 단번에 알아보게 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기병대 병력만 충분히 있다면 어떤 페르시아 군대라도 이길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곧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게 됩니다. 페르시아 군의 계획은 알렉산드로스가 강을 건너도록 유인하여 지상전으로 그를 물리칠 계획을 세웠지만 이 계획이 거의 성공하는 듯 하였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지략으로 페르시아군의 진열이 깨지면서 이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게 됩니다. 이 승리로 소아시아 서부가 마케도니아군에게 점령되었으며 대부분의 도시들은 일제히 성문을 개방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참주들은 추방되었고 그리스에서 마케도니아가 시행한 정책과는 대조적으로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페르시아 정복을 발판으로 이집트 원정까지

BC 334 ~333년 겨울, 알렉산드로스는 소아시아 서부를 정복하고 리키아와 피시디아의 산악 부족들을 복속시켰으며 그해 봄에는 해안도로를 따라 페르가로 진군을 하였는데, 이때 운이 좋게도 바람의 방향이 바뀐 덕분에 클리 막스 산의 절벽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함대의 유능한 그리스인 지휘관인 멤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유리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는 고르디움에서 앙키라로 진격하고 이어 카파도키아와 킬리 키아 관문을 통해 남쪽으로 계속해서 진군해 갔습니다. 또다시 알렉산드로스는 남쪽으로 시리아와 페니키아까지 진군해 들어갔는데, 그의 목표는 페르시아 함대를 기지로부터 고립시켜 전투력을 상실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파르메니오를 앞서 파견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다리우스의 군자금을 비롯한 수많은 전리품을 확보하도록 하였으며, 다리우스가 평화협상을 제안하는 서신을 보냈을 때 그 응답으로 그는 페르시아의 역사적 과오를 조목조목 밝히면서 자신을 아시아의 군주로 인정하고 무조건 항복할 것을 요구하는 오만함을 보였다고 합니다. 결국 비블로스와 시돈까지 점령한 알렉산드로스는 섬 도시 티레에서 저항에 마주쳐서 입성을 거부당하자 모든 포위 공격술을 총동원해 그곳을 점령하려 했지만 티 레인 들은 저항을 계속하면서 무려 7개월 동안이나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페르시아 군은 소아시아에서 육로로 반격을 가하다가 대 프리지어의 사트 라프인 안티고노스에게 패배했으며 해상으로도 반격을 하면서 상당수의 도시와 섬들을 되찾게 됩니다. 이어 BC 332년 7월 티레를 함락시킨 것은 알렉산드로스의 가장 큰 군사적 성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살육이 벌어졌고 여성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려가기도 하였습니다. 그해 11월에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집트인 들은 그를 구원자로 영접했으며, 페르시아 사트라프인 마 자케스는 현명하게 항복하는 길을 택하였고, 이집트 정복으로 이제 지중해 동부 해안 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원정은 계속된다

이쯤 되자 알렉산드로스는 더 큰 정복의 꿈을 꾸게 되는데요, 그는 마케도니아인들과 페르시아인을 연합해서 지배 세력을 구축하려는 구상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당시 백성들의 그에 대한 오해가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다리우스 추격전에 계속 나가면서 그전에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보물들을 모아 하르팔 로스에게 맡기고 하르팔 로스가 엑바타나에서 재정장관의 자격으로 그것을 관리하도록 하였습니다. 파르메니오도 또한 메디아에 남아 보급 수송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도록 하였습니다. BC 330년에는 동부 지방을 향해 빠른 속도로 라가이와 카스피해 관문을 통과하였으며 카스피해 관문에서 박트리아 사트 라프인 베소스가 다리우스를 폐"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찬탈자 베소스는 지금의 샤루드 부근에서 접전을 벌인 끝에 다리우스를 칼로 찔러 죽이게 하였는데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시신을 발견하고 페르세폴리스의 왕실 묘지로 보내어 정식으로 예를 갖춰 매장하도록 하였습니다. 다리우스가 죽어버리자 알렉산드로스가 개 왕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데 장애물이 없어졌고, BC 330년에 새로 로도스의 한 명문에서는 알렉산드로스를 '아시아의 군주'라고 불렸으며 그때부터 아시아에서 발행되는 주화에는 왕의 칭호가 붙여지게 됩니다. 엘부르즈 산맥을 넘어 카스피해 지방으로 가서 그는 히르카니아에 있는 자더라 카르타를 점령하고 한 무리의 사트 라프들과 페르시아 유명인사들에게서 항복을 받고 그중 일부는 원래의 직책에 유임하였으며, 서쪽으로 아몰을 견제하는 작전을 펼쳐 그는 엘부르즈 산맥에 거주하는 산악 부족인 마르디족까지 제압해 갑니다. 또한 그는 다리우스 휘하에 있던 그리스 용병들의 항복을 받아내고 이제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으로의 진출은 급격하게 빨라지게 됩니다. 아리아에서 그는 항복하는 척하다가 반란을 일으킨 사티바르자네스를 제압하고 아리아인의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