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 1769 ~ 1821)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서유럽의 여러 나라에 오랜 기간 영향을 미친 개혁을 이뤄냈으며 프랑스의 군사적 팽창에 가장 큰 열정을 보였던 인물인데요, 나폴레옹이 몰락했을 때 프랑스의 영토는 1789년 혁명 때보다는 많이 줄었지만 나폴레옹이 살았던 동안에 그리고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다스린 제2제정이 막을 내릴 때까지 그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나폴레옹의 생애와 함께 나폴레옹의 죽음에 대한 내용까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나폴레옹의 유년기와 가난한 청년시절
브리엔 유년 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1784년)한 후 그는 파리의 사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는데요, 열여섯 살 되던 해의 나폴레옹은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학교의 교칙 때문에 멀리 떠날 수 없었습니다.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그는 무척이나 속상해하며 자신이 처한 현실에 한탄하지만 그래도 꾹 참으면서 학업에 충실해 몹시 뛰어난 성적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 남부의 바랑스라고 하는 작은 지방의 포병 부대의 소위로 임관하게 됩니다. 그곳의 군인들은 열여섯 살 밖에 되지 않고 키도 작은 나폴레옹의 말을 잘 듣지 않았으며, 그에 오기가 발동한 나폴레옹은 더 열심히 그들을 통솔하면서 결국에는 최고의 사관이라는 칭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뒤 3년이라는 시간 뒤 오손느 포병 연대에 소속을 옮기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오손느 포병 연대에 들어가 생활하던 중 어머니로부터 몸이 불편하니 도와달라는 한 통의 편지를 받고 10년 만에 코르시카섬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시기의 프랑스의 왕이었던 루이 16세의 횡포로 프랑스는 완전히 무너져가고 있었으니, 그 틈을 타서 코르시카도 의회를 만들게 됩니다. 대표자의 경우는 파스콸레 파올리라는 코르시카 군인이 맡게 되어 나폴레옹은 다시금 포병 연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짐을 덜기 위해서 넷째인 루이도 함께 왔었는데, 나폴레옹의 형편은 하루 한 끼 식사만 할 수밖에 없이 가난했지만 동생 루이만큼은 본인의 시계를 팔아서라도 빵을 사 먹이 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루이 16세가 처형되었고, 공화정이 시작되면서 의장인 파올리는 독립을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프랑스는 공화정인 데다가 코르시카가 독립하게 되어도 잘 살 보장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가족들을 데리고 쿨롱까지 도주를 하게 됩니다. 당시 나폴레옹의 나이는 고작 24세였습니다.
청년 나폴레옹 국가의 영웅으로, 그리고 수석 통령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다
나폴레옹은 쿨롱에서는 프랑스혁명의 불길이 자국으로 옮겨 붙는 것을 염려한 영국이 프랑스에 쳐들어 오면서 이때부터 그의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데요, 당장에 영국군을 섬멸한 나폴레옹은 1975년 파리에서 왕당파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 역시 바로 진압하면서 국민들의 큰 지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1796년 나폴레옹은 조제핀과 결혼을 하였고 불과 27세의 나이로 이탈리아 원정군의 사령관에 임명되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군을 거세게 몰아내기 시작합니다. 또한 이탈리아를 정목 한 후 1797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에서 오스트리아와 협정을 맺어 네덜란드 남부를 프랑스에 넘기게 하였습니다. 또한 영국을 무너트릴 계획을 세우고 1798년 영국 와 인도를 잇는 길목의 이집트로 원정을 떠나는데 이집트 원정을 가던 중 아라비아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지만 결국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를 함락하게 됩니다. 이집트 원정에서는 상형문자를 해독하는데 큰 영향을 준 로제타스톤을 발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시절 프랑스는 자코뱅과 지롱드의 권력 싸움과 폴 바라스의 사치스러운 정치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부하 몇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와 11월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해 기존의 헌법을 폐지하고 3명의 통령이 정치를 하는 새 헌법을 만들어 1802년 8월 드디어 프랑스의 수석 통령으로 오르게 됩니다.
러시아 원정의 실패와 엘바 섬으로의 유배 이은 세인트 렐레나 섬에서 나폴레옹의 죽음
이렇게 거침없이 나아가던 나폴레옹은 1804 종신 통령을 거쳐 '나폴레옹 법전'을 편찬하고 5월에는 국민 투표를 통해 황제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하는데요, 1805년 10월 나폴레옹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에스파냐 함대와 연합하여 영국 함대를 공격하였지만 영국의 넬슨 제독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화가 난 나폴레옹은 전 유럽 나라에 대륙 봉쇄령을 선포하고, 영국과 통상을 중지하게 되었는데요, 비슷한 시기에 나폴레옹은 조제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의 왕녀였던 마리 루이즈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1812년 러시아가 봉쇄령을 어기고 영국과 통상하는 것을 알게 되자 그해 5월 46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러시아로 쳐들어가 모스크바에 입성하였지만 러시아의 엄청난 추위와 초토화 작전에 밀리면서 10월에 모스크바에서 후퇴하게 됩니다. 러시아 원정의 실패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프로이센 등의 군대가 프랑스를 공격해 오고, 1814년에는 파리를 내어주고 말았으며, 그해 4월에는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이후 엘바 섬에 유배되었을 때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에서 유럽 각국의 통치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열었는데, 이것이 바로 '빈 회의'로 별 성과 없이 나폴레옹의 1815년 2월 엘바 섬 탈출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 한 뒤 3월 20일에 파리에 입성하여 다시금 그의 시대를 부활하는 듯 보였지만, 1815년 6월 18일, 브뤼셀 교외의 지역에서 있었던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과 동맹국들에게 대패하여 6월 28일에 왕정이 복고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 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지병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1821년 5월 5일에 5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죽음 후 19년이 지나서야 파리로 돌아오다
현재 나폴레옹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앙발리드는 원래 루이 14세가 본인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부상당한 수천 명의 병사들을 위해서 세운 요양소로 이용되던 곳이었는데요, 앙발리드는 1671~1676년에 세워졌으며, 엄격하리 만큼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장식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곳의 요양소로서의 기능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데, 나폴레옹의 유해는 그가 유배지인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죽은 지 19년이나 지난 후인 1840년 12월에 앙발리드 중앙에 있는 돔 교회당으로 이장되었습니다. 현재는 군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생루이 데 쟁발리드 교회당과 돔 교회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군사 박물관에는 전쟁기념품과 그림, 벽화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생루이 데 쟁발리드 교회당에는 나폴레옹이 정복한 나라들의 국기들이 깃발로 장식되어 있습니다.